좋은 공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하원 동선과 조명을 치수로 고치며 배운 것. 공간이 배움을 바꾸는 순간과 좋은 공간이 사라지는 이유를 기록합니다.
줄자를 들고 다니는 이유
제 가방에는 5미터 줄자와 조도계가 늘 들어 있습니다. 시설 일은 대부분 숫자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문의 유효 폭이 몇 센티인지, 책상과 책상 사이가 몇 센티인지, 화이트보드 앞 조도가 몇 럭스인지. 작년 가을 에픽어학원 캠퍼스에 합류해서 처음 한 일도 건물 전체를 재서 치수가 적힌 도면 한 장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교실 여섯 개의 문 폭과 복도 유효 폭, 계단참 깊이까지 한 장에 다 적었습니다. 그때는 그 숫자들이 아이들의 하원 시간까지 바꾸게 될 줄 몰랐습니다.
하원 7분을 3분으로 줄인 과정
하원 시간 현관은 매일 같은 자리에서 막혔습니다. 두 반 26명이 동시에 나오면 마지막 아이가 신발을 신고 나가기까지 7분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한 줄로 천천히”라고 적은 안내문을 붙여 봤는데, 사흘 만에 소용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제야 줄자를 꺼냈습니다. 현관 폭은 1.6미터인데 신발장이 40센티를 차지해 유효 통로는 1.2미터. 아이 한 명이 바닥에 앉아 신발을 신으면 남는 폭이 60센티 정도라, 한 명이 앉는 순간 뒤가 전부 정체되는 구조였습니다.
신발장을 벽에서 떼어 90도로 돌려 세우고, 앉아서 신발 신는 구역과 지나가는 구역을 분리했습니다. 여기에 두 반의 하원을 5분 시차로 나눴더니 마지막 아이까지 3분이면 나갑니다. 몇 주 뒤 한 학부모님이 데스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즘은 애 기다리면서 이중주차 할 일이 없네요.”
시설 담당이 한 명뿐이라는 것
이 모든 일을 제가 직접 합니다. 저희는 시설 팀이 따로 있는 규모가 아니어서, 측정도 이동도 타공도 제 몫입니다. 지난달에는 화이트보드 앞 조도가 320럭스로 나와 등기구를 직접 교체했고, 520럭스가 됐습니다. 기준표에는 300럭스면 된다고 적혀 있지만, 뒷자리에서 보드 글씨가 흐리다는 말이 나오면 저는 기준보다 아이들의 눈을 믿는 편입니다. 업체를 부르면 견적에만 사나흘 걸릴 일이 반나절에 끝나는 것은 작은 규모의 장점입니다. 대신 신발장을 혼자 옮기다 문틀 모서리를 찍어 퍼티로 메운 것도 저고, 그 자리를 아직 도색하지 못한 것도 저입니다.
좋은 공간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동선을 바꾼 뒤 누구도 현관이 좋아졌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신발장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빨리 나간 날로 기억합니다. 학부모님이 느끼시는 것도 현관 치수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기다림이 사라졌다는 감각뿐이겠지요. 복도 조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나간 등을 갈았다고 인사를 받은 적은 없지만, 등이 나가 있으면 그날로 데스크에 이야기가 들어옵니다. 공간이 화제가 되는 날은 대개 무언가 고장 난 날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설 일의 성적표를 감탄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줄자를 들고 복도를 재는 이유입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동안, 공간은 계속 배움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