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안이 지고 나서 시작된 일

커리큘럼 회의에서 반대했던 안을 전력으로 실행하다, 팀이 함께 세운 가정이 다시 쓰이는 과정을 지켜본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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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분 회의에서 제 안이 진 날

올해 가을, 에픽프렙 중등 리딩 커리큘럼 개정 회의가 있었습니다. 늦은 오후였고, 회의는 90분 동안 이어졌고, 화이트보드에는 지문 두 편이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마커 뚜껑을 여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종류의 회의였습니다. 왼쪽은 제가 가져간 1,400단어짜리 긴 지문, 오른쪽은 Kwan이 가져온 700단어짜리 지문 두 개. 저는 긴 지문을 끝까지 통과하는 정독 경험이 리딩의 근력을 만든다고 주장했고, Kwan은 루브릭에서 뽑아 온 숫자를 먼저 화면에 띄웠습니다. 지문 후반부 문항의 무응답과 찍기 답안 비율이 62퍼센트라는 숫자였습니다. “뒷부분은 지금 절반 넘는 아이들이 못 읽고 넘어가요. 길이부터 줄여 봐요.” Kwan의 말에 Chris가 고개를 끄덕였고, 결정은 짧은 지문 두 개 체제로 났습니다.

솔직히 적자면, 회의실을 나오면서 저는 꽤 오래 서운했습니다. 그 긴 지문들은 제가 한 편씩 끝까지 읽고 고른 텍스트였고, 반박당한 것이 제 논리인지 제 안목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더 부끄러운 고백도 있습니다. 파일럿이 살짝 삐끗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하루쯤 제 안에 있었습니다.

승복은 실행의 양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정리한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결정이 났으면 이 안이 성공할 수 있는 최대치를 실험해 봐야, 실패하더라도 배우는 것이 남습니다. 승복에 필요한 것은 동의가 아니라 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채택된 안을 반쯤 미심쩍어하는 손으로 다루면, 나중에 결과가 나빠도 그것이 안의 실패인지 실행의 실패인지 아무도 가려낼 수 없게 됩니다. 8주 파일럿 분량으로 지문 열여섯 편을 새로 골랐고, 긴 지문을 반으로 자르는 대신 처음부터 짧은 호흡으로 완결되는 텍스트를 찾았고, 회차마다 발문을 새로 설계했습니다.

지문을 고르다가 발견한 것

전력으로 실행하다 보니 회의실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습니다. 짧은 지문 두 개를 한 회차에 넣으려면 두 지문의 어휘 밴드가 이어져야 했는데, 열여섯 편을 표로 펼쳐 놓고 보니 제가 아끼던 긴 지문들의 공통점이 드러났습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낯선 어휘의 밀도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텍스트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멈춘 지점은 길이의 한계선이 아니라 어휘의 절벽이었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파일럿 초반 2주는 제 실수로 흔들렸습니다. 난이도를 렉사일 지수로만 맞추고 배경지식 부담을 보지 않아서, 2주 차 오답률이 오히려 48퍼센트까지 올라갔습니다. 3주 차부터 회차 앞에 어휘 사전 노출 카드를 붙이고 나서야 숫자가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8주가 끝나고 지난달 리뷰에서 결과를 열었습니다. 세 개 반 스물일곱 명의 평균 오답률은 41퍼센트에서 33퍼센트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반별로 쪼개 보니 이상했습니다. 개선 폭이 가장 컸던 반은 어휘 카드를 가장 성실히 돌린 반이었고, 어휘 정답률과 지문 이해도의 상관이 길이 변수보다 훨씬 뚜렷했습니다. 짧아진 길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결과였습니다. 수업 후에 한 학생이 남긴 말도 같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두 번째 지문은 아는 단어가 많아서 끝까지 읽혔어요.”

팀이 가정을 다시 꺼내 놓은 자리

리뷰 회의에서 Kwan이 먼저 말했습니다. “길이가 원인이라고 확신했는데, 데이터는 어휘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저도 제 가정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정독이 근력을 만든다는 제 믿음도, 길이를 줄이면 풀린다는 팀의 결정도 절반씩만 맞았습니다. 문제의 이름이 바뀌자 다음 개정의 방향도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전반 4주를 짧은 지문과 어휘 스캐폴딩으로, 후반 4주를 긴 지문 정독으로 돌아가는 혼합안을 겨울 학기에 올려 두고 검증하는 중입니다.

돌아보면 제 안이 그대로 채택되었더라도 이 발견은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는 회의실에서 끝내고, 결정된 안을 한계까지 밀어 본 사람만 가정이 틀린 지점을 정확히 가리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음 회의에서도 아마 또 반대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면, 또 전력으로 실행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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