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강사를 둘러싼 세 가지 오해
학원 강사는 소모된다는 말 속의 오해 세 가지를, 수업 참관과 커리큘럼 회의에서 겪은 장면으로 반박합니다.
“그 일, 사람 갈아 넣는 거 아니야?”
지난 설에 만난 대학 동기가 물었습니다. “아직 학원이야? 그 일, 사람 갈아 넣는 거 아니야?” 저는 웃었지만 그 말이 어디서 오는지 압니다. 작년에 에픽어학원에 합류하기 전까지는 저도 반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미리 말해 두자면 힘들지 않다는 반박은 못 합니다. 같은 지문으로 하루 세 번 수업하는 날이면 세 번째 교시에는 목소리가 갈라집니다. 그 피로는 진짜입니다. 다만 1년을 지나 보니 피로와 소모는 다른 문제였습니다. 동기의 말 안에 섞여 있던 오해 세 개를 이제는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오해 1. 학원 강사는 커리어가 없다
학교 같은 호봉표나 그려진 승진 사다리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판단이 쌓이는 것을 커리어라고 부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물론 저절로 쌓이지는 않습니다. 회의에서 제안을 하려면 평소에 아이들의 말을 받아 적어 두는 수고가 필요하고, 그 수고를 대신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올해 봄학기 커리큘럼 회의에서 저는 리딩 레벨 하나의 지문 두 개를 교체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근거는 아이들의 말이었습니다. 작년 겨울 내내 같은 페이지에서 “선생님, 요즘 누가 이렇게 말해요?”라는 질문이 반복됐고, 저는 그것을 지문이 낡았다는 신호로 읽었습니다.
제안은 채택되었고, 바뀐 지문으로 수업한 첫 주에 한 아이가 말했습니다. “이 책은 좀 읽을 만하네요.” 6학년이 하는 최고 수준의 칭찬입니다. 강사가 커리큘럼 결정에 들어가고, 그 결정의 결과를 교실에서 확인하고, 다음 학기에 다시 고치는 순환. 이 순환이 도는 동안 쌓이는 판단을 저는 커리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오해 2. 수업만 반복한다
이곳에는 서로의 수업에 들어가 앉는 참관 문화가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캠퍼스 디렉터인 Rachel이 제 화요일 수업 뒤에 앉았고, 끝나고 30분 동안 피드백을 나눴습니다. 그날 들은 말은 “질문하고 3초를 못 기다리시네요”였습니다. 억울해서 수업 녹음을 다시 들었는데, 정말 못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질문을 던지면 속으로 다섯을 셉니다. 아이들이 먼저 입을 여는 횟수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실패담도 있습니다. 올해 초 토론 형식을 새로 짜서 들어갔다가 10분 만에 교실이 조용해졌습니다. 한 아이가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 뭘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형식은 그날로 접었습니다. 다음 주에 Jamie의 수업을 참관하러 가서, 지시문을 칠판에 세 줄로 쪼개 적는 방법을 그대로 훔쳐 왔습니다.
같은 지문을 반복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면을 읽고도 2시 반 아이는 “주인공이 답답해요”라고 하고, 5시 반 아이는 “저라도 그랬을 것 같은데요”라고 합니다. 수업은 반복되어도 대화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오해 3. 교육 철학은 사치다
철학은 큰 단어지만 쓰이는 자리는 작습니다. 한 아이가 에세이를 반으로 접어 내밀며 “저는 원래 글 못 써요”라고 말할 때, 그 자리에서 뭐라고 답할지가 철학의 문제입니다. 저는 그날 “우리 반에서 ‘원래’는 금지어예요”라고 답했고, 그 아이는 학기 말에 두 장짜리 글을 냈습니다.
물론 진도와 마감 앞에서 철학이 뒤로 밀리는 날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치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달 강사 회의 안건 하나는 단어시험 재시험 기회를 몇 번까지 줄 것인가였습니다. 운영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이를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라서, 회의는 한 시간을 넘긴 끝에 “두 번까지, 두 번째는 범위를 좁혀서”로 정리되었습니다.
소모되는 날과 쌓이는 날
동기에게 다시 답한다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소모되는 날은 분명히 있어. 그런데 내가 한 수업과 들은 말이 어딘가에 쌓여. 소모와 축적을 가르는 건 학원이라는 간판이 아니라 그 쌓임이 있느냐는 질문이더라.” 지난주에는 한 아이가 가방을 싸다 말고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년에도 여기 있을 거죠?” 저는 “응, 있을 건데. 왜?”라고 답했고, 아이는 “그냥요”라고 하고 갔습니다. 그 “그냥요”를 집에 가는 길 내내 생각했습니다.